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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2025. 8. 7. 11:59


    죽음은 조용히 찾아왔다. 병실의 형광등은 나직이 깜빡이고 있었고, 기계음은 리듬을 잃어가고 있었다. 최중수, 팔십팔 세.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 그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뜬 것처럼 느껴졌다. 병원 침대가 아닌, 허공이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공간, 색도 모양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육신이 아닌 영혼의 무게로 존재하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자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입술도, 혀도 없이. 단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하얀 옷을 입은 자가 나타났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완벽한 얼굴. 주름 하나 없고, 눈빛은 깊었고, 손은 마치 구름으로 빚은 것 같았다.

    “최중수 씨. 축하드립니다. 죽음을 무사히 통과하셨습니다.”

    중수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지옥인가요? 아니면… 천국?”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여긴 ‘경계’입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닙니다.”

    경계. 그 단어가 중수의 가슴을 묘하게 쿡 찔렀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그는 이미 죽었고, 가족들과 친구들, 아내와 아들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손자 ‘예준’이었다.

    “나는… 마지막 말을 못 했어요. 예준이에게. 난… 그 아이를 정말, 사랑했는데… 그 말 한마디를 못 하고…”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기회를 드리려 합니다. 단, 쉬운 건 아닙니다. 네 개의 관문. 그리고 단 세 번의 기회. 모두 통과하면, 단 1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습니다.”

    1분. 단 60초.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지금 중수에게는 천 년보다도 소중했다.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의지는 단단했다. 그렇게 최중수는, 생애 마지막이자 가장 큰 여정을 시작했다.

    중수는 붉은 사막 같은 공간 위에 서 있었다. 발끝엔 모래가 없는데, 발밑은 분명히 무언가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하늘은 없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병실의 기계음이 맴돌았고, 손자 예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 눈물 자국이 번진 채 잠든 얼굴이었다.

    “첫 번째 관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관리자의 손짓 하나에 공간은 찢어지듯 열렸다. 그 안에는 익숙한 거리, 그리고 오래전 중수가 살던 동네의 집들이 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젊은 자신이 그 앞에서 웃고 있었다.

    “이곳은 ‘기억’의 관문입니다. 잊고 싶었던 것, 잃고 싶었던 것, 모두와 마주해야 합니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중수는 그 순간 느꼈다. 무언가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젊은 시절, 후회로 남은 기억들. 아내와의 다툼, 아들과의 단절, 그리고 예준의 어린 시절에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

    그는 자신의 젊은 모습을 따라가며 장면 장면을 지나쳤다. 때론 따뜻했고, 때론 쓰라렸고, 때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 장면, 그는 자신의 아내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중수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는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관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관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첫 번째 관문, 통과하셨습니다.”

    두 번째 관문 앞. 그곳은 거대한 연못과 수많은 나무들이 가득한 숲이었다. 안개가 자욱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엔 묘한 기척이 있었다.

    “이곳은 ‘용기’의 관문입니다.”

    관리자는 설명했다. “당신의 두려움, 당신의 망설임, 당신의 불안이 실체가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을 마주하고, 직면하고, 꿰뚫어야 합니다.”

    중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숲 속으로 들어섰다. 주변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나무 사이에 무언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놀란 중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죽은 아들이 서 있었다. 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눈빛은 차갑고 싸늘했다.

    “당신은 날 이해하지 못했죠. 늘 당신 기준대로만 살라고 했어요.”

    “아니야… 난… 널 지키고 싶어서…”

    “지켜준 게 아니라, 감췄죠. 당신의 두려움 때문에.”

    중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들의 환영을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그 순간 주변의 나무들이 갑자기 거대한 팔처럼 변해 중수를 옥죄기 시작했다. 혼란, 공포, 후회가 한꺼번에 덮쳐왔다.

    “그만… 그만해…!”

    그는 견디다 못해 무릎을 꿇었다. 숲 전체가 울리듯 진동했다. 그리고 관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기회를 소진하셨습니다.”

    중수는 눈을 감았다. 땀이 흘렀고, 호흡은 가빴다. 그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다시 다짐의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아직 두 번 남았다.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방금 전의 실패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연못가에 앉아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결코 땅을 향하지 않았다. 손자 예준의 웃는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번엔… 다르게 할 거야.”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숲은 여전히 그를 시험하듯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고,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다시금 어둠이 그를 삼켰고, 마침내 또다시 누군가의 형상이 나타났다. 이번엔 그의 아내였다.

    “중수야…”

    그 목소리는 너무도 그리웠고, 너무도 아팠다. 하지만 중수는 이번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생전에 병에 시달렸고, 중수는 그 고통을 온전히 나누지 못했던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해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했어. 나는… 네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어.”

    그는 아내의 환영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치지 않을게.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얼마나 못난 남편이었는지… 모두 안고 갈게.”

    그 순간, 아내의 환영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 나타난 건… 바로 중수 자신의 모습이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손자 예준에게 소리를 지르던 과거의 자신.

    “예준아! 너도 똑같아! 네 아버지처럼…!”

    그 말은 중수 스스로도 평생 후회한 한 마디였다. 그날 예준은 고개를 떨군 채 방으로 돌아갔고, 이후 중수는 그와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중수가 먼저 다가갔다.

    “그건… 내 두려움이 만든 말이었어. 내가… 너를 또 잃을까봐. 내가 너에게 기대했던 건, 내 외로움을 덜기 위한 이기심이었어.”

    분노의 환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엔 고통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야… 이해해주는 거냐…”

    “그래.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네 마음을… 안다.”

    그 말이 끝나자, 어둠은 갑자기 걷히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제 모습을 되찾았고, 안개는 맑은 연기로 흩어졌다. 그리고 숲 한가운데, 작은 길이 열렸다.

    관리자가 조용히 나타나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관문, 통과하셨습니다.”

    중수는 숨을 내쉬었다. 아직 두 개의 관문이 남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뿌듯함과 안도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중수는 세 번째 관문 앞에 섰다.
    그곳은 커다란 거울로 가득한 방이었다.
    거울은 사방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속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평생 숨기고 싶었던 모습,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반사되어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속의 ‘자신’은 냉담하고, 무표정했으며, 마치 감정을 거세당한 듯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왔다. 차가운 눈빛으로 중수를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내면 깊은 곳에 숨긴 두려움, 후회, 죄책감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중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평생 자신을 괴롭혀온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나왔다.
    젊은 시절 가족에게 상처 준 일,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순간들,
    그리고 자신을 증오했던 순간까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거울 속 자신과 마주했다.

    “나는… 두려웠다.
    진짜 나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면 이제, 그 진실 앞에서 눈을 감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중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는 지난 날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이 남긴 상처에 대해
    마음 깊이 사죄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힘들게 했구나. 미안하다.
    나 자신을 용서하니, 비로소 너를 놓아줄 수 있겠다.”

    거울은 서서히 밝게 빛났고,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짙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중수를 향해 음산한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네가 준비됐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널 시험할 것이다.
    진정한 용기와 결단 없이는 이 관문을 넘을 수 없다.”

    그림자는 무수히 많은 손을 뻗어 중수를 공격했다.
    그는 휘청이며 균형을 잃었고, 결국 쓰러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는 듯했다.

    중수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땅에 앉아 있었다.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첫 번째 기회를 잃고 말았다.”
    중수는 몸을 일으키며 단단히 다짐했다.

    “나는 이길 것이다.
    내 마음속 모든 어둠과 맞서 싸울 것이다.”

    그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이번에는 그림자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울 속 자신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었고,
    숨겨둔 상처를 직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자신의 약점과 마주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졌다.

    관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 기회를 희생하여 다른 이를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용기와 진실에 대한 대가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중수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이 기회를 마지막처럼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마지막 관문은 한없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그 빛 속에는 세상의 모든 사랑과 희망이 녹아 있었다.
    중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지막 장애물과 마주했다.
    그것은 그의 가장 깊은 두려움,
    바로 손자 예준과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고통이었다.

    “1분만 허락하라.”
    중수는 간절히 외쳤다.
    “내게 단 1분만 주어진다면,
    사랑하는 손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함과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
    4번째 기회를 허락하겠다.”

    중수는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그는 1분간 현실로 돌아왔다.

    병실, 어린 예준의 얼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예준은 놀라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중수는 힘겹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사랑한다, 예준아.
    그동안 전하지 못한 이 말,
    이제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예준은 눈물을 글썽이며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1분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중수의 영혼은 한동안 그 빛 속에서 머물렀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마지막 사랑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그 짧은 1분이 그의 삶에
    가장 큰 의미로 남았다.

    그리고 예준은 알았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담긴 무게를,
    그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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