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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나게 썸타기❤️소설 2025. 12. 7. 09:20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교실은 늘 그렇듯 떠들썩했다. 도시락 뚜껑이 열리는 소리, 친구들끼리 모여서 게임 이야기나 주말 약속을 정하는 소리, 복도에서 급식 줄 서는 아이들의 발자국이 교실 안까지 울려왔다. 그런 혼잡한 풍경 속에서도 남주혁은 늘 하던 대로 조용히 창가 자리에서 국어책을 펴놓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읽는 건 아니었다. 그냥 책을 열어 놓으면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도 조금은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던 주혁의 앞에 휙 하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혹시… 너, 남주혁 맞지?”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주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자리에는 이주연이 서 있었다.
햇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인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반짝였고, 눈동자엔 묘하게 따뜻한 반짝임이 있었다. 평소 조용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유명한 아이인데 이렇게 가까이 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응, 나 맞는데?”
주혁은 조금 당황한 채 대답했다.
주연은 잠시 망설이더니, 왠지 모르게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혹시 과학 조별과제 같이 할 수 있어? 아까 선생님이 조 짜라 했는데, 너 아직 조 없지?”
순간, 책을 들고 있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주혁은 자신이 무척 평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성적도, 외모도, 운동도 다 중간. 그래서 누가 먼저 다가와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 응. 나 조 아직 없어.”
“그럼 우리 팀하자!”
주연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따뜻한 공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주혁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는데, 그러자 주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책상 반대편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방과 후에 과학실에서 만나자. 시간 괜찮지?”
“…응.”
그 대화를 끝으로 주연은 친구들에게 돌아갔는데, 이상하게 그 짧은 순간이 주혁의 마음속에 깊게 남았다.
마치 일상이 아주 조금 비틀린 느낌.
아주 사소한 균열이 생긴 것 같은데, 그게 나쁜 느낌이 아니라… 묘하게 설레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늘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남기기 마련이다.
“야. 남주혁이랑?”
조용히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김현준이었다.
운동부라서 키도 크고, 반에서도 인기가 많은 학생. 주연을 좋아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주연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눈빛을 좁혔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
“하… 진짜?”
그 말은 짧았지만, 무언가 시작될 조짐을 담고 있었다.
주혁은 그 눈빛을 알아채지 못한 채 조용히 책을 덮었다.
방과 후 과학실은 어둑하고 조용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이 실험용 책상 위에 길게 비치고, 시험관들이 붉은 빛을 머금은 채 반짝였다.
주혁은 아직 아무도 없는 과학실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를 펼쳐놓았다.
조금 긴장되긴 했지만, 괜히 설레기도 했다.
문이 열리고, 살짝 빨라 보이는 발걸음이 다가왔다.
“미안! 나 좀 늦었지?”
숨을 살짝 몰아쉬며 주연이 들어왔다.
“아냐, 나도 금방 왔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았고, 조별 과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연은 생각보다 정말 열정적이었다.
“이 부분은 실험 결과를 그래프로 정리해도 좋을 것 같아.”
“아, 그럼 내가 그래프는 할게.”
“진짜? 고마워! 너 수학 잘하지 않나?”
“아… 그냥 보통.”
주혁은 조금 부끄럽게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주연이 그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근데… 너 말하는 거 되게 조심스럽다. 원래 그래?”
“…그런가?”
“응. 뭔가 되게 착해 보인다.”
그 말 한마디는 주혁의 귀까지 붉어지게 만들었다.
부끄러웠지만, 그 말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너무 행복한 순간엔 꼭 방해가 따라오는 법이다.
과학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거칠게.
“야. 여기 있었네.”
그 목소리는 김현준이었다.
뒤에는 김진이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뭐해? 둘이 데이트라도 하는 줄?”
현준이 spiky한 말투로 말했다.
주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주연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
“과제하는 거잖아. 왜?”
주연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현준이 대답 대신 주혁을 힐끗 쳐다봤다.
그 눈빛 속에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분명 질투, 그리고 묘한 경계심.
“그냥 봤다고.”
현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 조 잘 해봐라. 방해는 안 할 테니까.”
그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아주 오래 머물렀다.
과학 조별과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주혁과 주연은 방과 후마다 자연스럽게 함께였다.
도서관에서 참고서를 찾고, 과학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학교 근처 카페에서 과제를 이어 쓰기도 했다.
처음엔 둘 다 어색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달라졌다.
서로의 말투나 버릇, 좋아하는 것들이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던 날,
주연이 책장을 넘기다 손등을 가볍게 부딪쳤다.
찰나였지만,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서로 꽤 오래 손을 떼지 못했다.
“아… 미안!”
주연이 먼저 손을 빼며 얼굴을 붉혔다.
“아냐… 내가…”
주혁도 말끝이 흐려졌다.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정적은 어색함보다는 묘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며칠 뒤엔 카페에서 과제를 하다 문득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주혁아, 너는… 친구들 많아?”
주연이 빨대를 물며 물었다.
“그냥… 몇 명? 많이 사귀는 편은 아니야.”
“왜? 말 걸어보면 되게 편한데.”
주연이 웃었다.
“너, 생각보다 되게 좋은 사람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혁의 마음 깊은 곳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건, 특히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가 있었다.
둘은 조금씩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아직은 말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따뜻한 감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평온함 뒤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도 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교실 뒤편에서는 현준과 그의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남주혁 걔 요즘 주연이랑 붙어다니더라.”
“말이 되냐? 걔가 주연이랑?”
현준은 대꾸 없이 입술만 꾹 다물었다.
분명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이걸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김진이 불편하게 헛기침을 했다.
“현준아… 너 진짜 주연 좋아하나 보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그냥… 그게 불편해서 그래.”
현준은 짧게 잘라 말했다.
김진은 그 대답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자신의 감정 때문에 점점 질투심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곧 학교 곳곳에서 문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혁이 괴롭힘을 당한 그날 이후, 교실의 분위기는 이상하고 무겁게 변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일들조차 누군가에겐 신호처럼 느껴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주연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주연은 의자를 세게 끌며 일어났다.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얘들아, 잠깐만.”
그 말에 교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멈췄다.
주연이 이런 모습으로 나서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오늘 체육관 쪽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아는 사람 있어?”
친구 몇 명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결국 책상 뒤쪽에서 슬쩍 손이 올라왔다.
“나… 지나가다가 봤어. 남주혁이… 너희 알아? 그 애들 몇 명이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어.”
“그거 괴롭힘이야.”
주연은 확실하게 잘라 말했다.
“그거, 그냥 장난 아니었어.”
교실이 조용해졌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친구, 평소 말수 적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김진이 SNS에 쓴 글도 봤어. 주연이 너… 괜히 남자애들한테 들이댄다느니… 그런 글.”
순간, 주연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더니,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근데 오늘은 진짜 아니야.”
교실 뒤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 몇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누가 봐도 그건 괴롭힘이었어.”
“우리 반인데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이 작은 움직임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일으켰다.
결국 소문은 담임 선생님의 귀까지 들어갔다.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남의 아픔을 장난으로 넘기면 안 된다. 학교는 조사 들어간다.”
현준은 “오해다”라고 말했지만, 증거와 목격자가 늘어나면서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김진의 SNS 글도 결국 삭제되었지만, 이미 여러 사람의 캡처에 남아 있었다.
조사 분위기는 점점 무겁고 현실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이 모든 일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주혁과 주연은 조용히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말은 많이 하지 않았지만 감정은 분명했다.
주연이 살며시 말했다.
“나… 네가 다치는 게 너무 싫어.”
주혁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너 지키려고 한 거니까.”
그 말에 주연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고마워. 정말.”
두 사람의 손은 흔들림 없이 단단히 맞잡혀 있었다.
그 모습은 교실 여기저기 있는 친구들에게도 잔잔한 울림을 남겼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와… 요즘 중학생들 진짜 멋있네.”
“그러게. 영화 같아.”
작은 웃음 소리들이 교실을 채우며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느꼈다.
이건 단순한 학교 소문이나 갈등이 아니라, 누군가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지키는 이야기구나.
조사가 진행되며 며칠 동안 반 아이들은 조용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얇은 유리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분위기였다.
현준은 말수가 줄었고,
김진은 SNS를 완전히 끊고 다녔다.
그 둘은 서로에게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기류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행동을 더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방과 후 뒤편 계단
조별 과제를 마치고 집에 가려던 도중,
주혁은 계단 아래 어두운 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리자,
벽에 기대 서 있는 현준이 보였다.
“잠깐만.”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주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멈춰섰다.
현준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며,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너랑 주연, 진짜 뭐야?”
주혁은 숨을 한 번 삼켰다.
“과제… 하고, 그냥 친해진 거야.”
“친해진 거?”
현준이 비웃듯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 주연 좋아하지?”
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이 이미 답이었다.
현준은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
“너 같은 애가 감히 그런 마음을 먹는 게… 이해가 안 되거든.”
말은 낮았지만, 마음을 찌르는 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발걸음이 빠르게 달려오더니—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만해!”
주연이었다.
숨이 조금 가빠져 있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현준아. 네가 나한테 뭐 느끼든 그건 네 자유인데…
네가 남주혁한테 이러는 건 진짜 아니야.”
현준은 굳어버렸다.
말 한마디 못하고 그대로 그녀를 보았다.
주연은 한 발 주혁 쪽으로 더 가까이 섰다.
“그리고… 누구랑 가까워지는지는 내가 정할 일이야.”
그 말은 단단하고 흔들림 없었다.
잠시 후,
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걸어갔다.
계단에 긴 침묵이 남았다.
두 사람만의 조용한 순간
주혁은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주연이 고개를 저었다.
“너 혼자 두는 게… 난 더 싫어.”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연은 주혁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 온기는 조용했지만, 너무나 뜨거웠다.
며칠 동안 학교는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혁과 주연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런 분위기보다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있었다.9
방과 후, 둘은 과학 발표 준비 때문에 또 도서관에 왔다.
햇빛이 프레임을 따라 길게 내려오고, 먼지가 공기 중에서 반짝거리는 고요한 오후였다.
주연이 책을 넘기다 말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요즘 거의 매일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아?”
주혁은 순간 책을 잡던 손을 놓칠 뻔했다.
“아… 어… 그렇긴 하지.”
주연은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 그를 바라봤다.
“너 계속 약간 긴장하잖아? 나랑 있을 때.”
“…티 나?”
주혁은 얼굴이 붉어졌다.
“엄청 나. 근데 귀여워.”
그 말 한마디에 주혁의 심장은 도서관 전체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순간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 그건…”
“그건?”
주연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너가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연은 잠시 말을 잃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책으로 내렸다.
“…그 말, 반칙이야.”
둘 사이에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정적이 흘렀다.
책장 너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둘은 완전히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주연은 우연히 주혁의 손목에 선명한 멍을 보았다.
순간 얼굴이 굳었다.
“…이거, 그날 생긴 거지?”
주혁이 황급히 소매를 내렸다.
“아냐, 그냥—”
“거짓말 하지 마.”
주연은 그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강하게 잡지는 않았지만,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주혁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너 걱정할까 봐.”
그 말이 끝나자,
주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주 작고 떨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바보야.”
주혁이 놀라 그녀를 보자,
주연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네가 맞고 다니는 걸 알고 있었으면… 난 그날처럼 또 네 옆에 있었을 텐데…”
주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히 두 사람의 손이 다시 맞닿았다.
이번엔 어느 쪽도 먼저 손을 떼지 않았다.
학교 조사는 처음보다 훨씬 깊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제 진짜 크게 문제 될 것 같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증언이 등장했다.
현준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담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그날 체육관 뒤에서 있었던 일… 사실 장난 아니었어요.”
그의 말에 교무실이 조용해졌다.
“애초에… 현준이가 먼저 불렀어요.
남주혁이 주연이랑 다닌다고…”
담임은 표정을 굳히며 메모했다.
“그러니까… 의도된 폭력이었다는 거니?”
“네…”
그 말은 순식간에 반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다.
김진 역시 조사실에서 불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예상보다 빨리 무너졌다.
“저… 그 글… 그때 화나서 쓴 거예요…
진짜 의미는 없었어요…”
목소리는 떨렸고, 손가락은 책상 아래에서 계속 꼼지락거렸다.
“그 글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어?”
선생님의 말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그녀가 울먹이며 말하자,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제 진실은 거의 다 드러나고 있었다.
조사가 진행되던 어느 날,
네 사람은 결국 같은 시간대에 복도를 지나게 되었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주혁과 주연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주연은 주혁의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현준과 김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한 지점에서 엇갈렸다.
순간,
복도 전체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현준의 표정은 복잡했다.
후회, 분노, 질투, 혼란—
모든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김진은 옆에서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얼굴이 창백했다.
주연이 먼저 말했다.
“현준아.”
현준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된 거, 나도 싫어.”
주연의 목소리는 흔들리지만 단단했다.
“근데… 주혁 괴롭힌 건 잘못이야.
그리고 나한테 한 것도 잘못이고.”
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알아.”
그 짧은 한마디에 김진이 놀라 그를 바라봤다.
현준은 계속 말했다.
“근데…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왜… 너 같은 애가 그 애를 선택한 건지.”
그 말에 주연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왜냐면—
주혁은 날 지켜줬으니까.”
순간,
현준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얼굴을 돌리고 말없이 걸어가 버렸다.
김진도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복도엔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현준과 김진이 사라진 후,
주연은 조용히 주혁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괜찮아?”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나보다 네가 더 힘들었겠지.”
“아니야.”
주연이 작게 웃었다.
“우리 같이 힘들었어.”
그 말에 두 사람은 잠시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서로 기대어 천천히 걸어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교실 복도에는 여전히 조금 전 일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듯 조용히 속삭였고, 몇몇은 아예 주연과 주혁 쪽을 힐끔거리며 계속 상황을 흘끗 살폈다. 이상하게도, 평소 같으면 가장 시끌벅적할 시간인데 지금은 공기가 한 층 눌린 것 같았다.
주연은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닦다가, 문득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책상 닦기였지만, 가까이서 본다면 그녀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혁 쪽으로 가 있었다. 주혁은 여전히 힘이 빠진 모습이었지만, 일부러 괜찮다는 듯 교과서를 펼치려 노력하고 있었다.
주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자리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최대한 평온하려 애썼지만, 작은 떨림이 숨겨지지 않았다.
주혁은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눈 아래 붓기가 미묘하게 남아 있었다.
“응. 근데 너는…?”
그녀가 오전 내내 울음을 참아온 걸 그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주연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작은 숨을 뱉고 말했다.
“나도 괜찮아. 그리고 아까… 그거, 진짜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라고 했잖아.”
이번엔 주혁이 먼저 말을 끊었다.
그는 조용히 책을 덮고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선택한 거야. 피할 수도 있었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어. 근데… 그러기 싫었어.”
주연은 그 말에 서서히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조용한 감정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주혁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다시 같은 일이 있어도… 난 똑같이 할 거야.”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어색함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듯한 고요했다.
그러나 이 따뜻한 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김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저 둘은 진짜 뭐야? 쟤가 울었다고 다들 난리였네?”
김진은 일부러 크게 말했고, 뒤에 따라오는 친구들과 피식 웃었다.
주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주혁도 싫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김진은 일부러 교실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주연을 위아래로 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 울고 가던데? 애초에 남의 남자한테 들러붙으니까 그런 일 생기는 거 아니야?”
“…그만해.”
주연은 떨리는 목소리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뭘? 나 사실 말한 거 없어. 너네가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주연의 표정은 이전과 달랐다.
겁먹은 눈빛이 아니라, 확실히 단단해져 있었다.
그러자 김진은 코웃음을 치며 돌려 말했다.
“쟤가 그렇게 지켜주니까 배짱이 좀 생겼네?”
그 순간, 주혁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김진아. 주연한테 그러지 마.”
그 말은 큰소리가 아니었지만, 교실을 순간 정적에 묶을 만큼 힘이 있었다.
김진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다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와… 대단하다. 그러다가 또 혼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주혁은 대답 대신 단단한 눈빛만 보여줬다.
마치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단순히 참고 있는 것도 아니고, 화를 폭발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켜야 할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조용하고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
주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조금 더 컸다.
김진은 그의 태도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그리고 억지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알겠어. 알아서 해.”
그러고 나가면서 작게 투덜댔지만, 예전처럼 자신감에 찬 태도는 분명 줄어 있었다.
김진이 사라지자, 교실 안에 남은 아이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놀란 눈빛으로, 누군가는 부러운 듯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주연은 주혁에게 다가가 아주 조용히 물었다.
“…지금, 나 때문이라고 화낸 거야?”
“아니.”
주혁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네가 누군가한테 상처받는 거… 그냥 싫어서.”
그 말은 특별히 멋진 문장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주연의 가슴을 간지럽게 뜨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숨을 작은 소리로 들이켰다.
그리고 말없이 잠시 그 옆에 섰다.
둘 사이 거리는 어색할 만큼 가까웠지만,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잠시 서 있었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질 만큼 위태롭고 달콤했다.
그리고 그때 교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둘이 진짜 사귀나?”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얼굴이 붉어졌고, 조용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둘의 가슴엔 같은 박동이 울리고 있었다.
주연은 수업이 끝난 후 급하게 가방을 챙기고 복도 밖으로 나왔다.
마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혹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듯 걸음을 천천히 늦추며 교실 옆 창가에 섰다.
창문 밖으로 내려오는 오후 햇빛이 복도를 밝히고, 그 빛 사이에 먼지들이 떠다니며 조용히 반짝였다.
잠시 후 주혁이 뒤에서 문을 닫고 나왔다.
문 닫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느껴졌고, 그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미묘하게 뛰었다.
“주연아.”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주연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살짝 웃었다.
“집 가?”
“응. 너도?”
“응…”
둘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복도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멀어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공백이 둘의 어색함을 더 크게 만들었다.
잠시 후,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주연이 갑자기 멈췄다.
주혁도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연은 계단 난간을 잡고, 천천히 무게를 실었다.
말하려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아까 고마웠어.”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말하기 시작했다.
“김진한테 말해준 거… 그리고 나 때문에 그 애들이 뭐라고 해도 지켜준 거…”
주혁은 잠깐 눈을 피했다.
어딘가 쑥스럽고, 마음이 간질거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 그건…”
그는 말을 고르며 작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그냥… 네가 울까 봐 싫었어.”
그 말에 주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 울었어?”
주혁은 살짝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보건실에서. 근데… 예뻤어.”
그 순간 주연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귀끝까지 붉어지는 기분이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 갑자기 하지 마.”
그녀의 목소리는 최대한 무덤덤하려 했지만, 너무 떨렸다.
주혁은 뭔가 잘못했나 싶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그냥 사실대로 말한 거였어.”
주연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데서 꾸준히 올라오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 사실, 네가 다친 거 보고… 너무 무서웠어.”
그녀는 난간을 꽉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네 옆에 있으면 네가 또 다칠까 봐… 그래서 조금 멀어지면 어떡해, 그런 생각도 들고…”
주혁은 그녀 쪽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 옆에 있고 싶어.”
단순한 말이었지만, 그 말이 지닌 힘은 놀라울 만큼 컸다.
주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조용해서 바람이라도 불면 사라질 듯했다.
주혁은 아주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원해서 그래. 누구 때문도 아니고.”
계단의 한 칸에 서 있는 둘 사이에, 미묘하게 긴 공기가 흘렀다.
누군가 내려오면 어색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고, 하지만 동시에 그 거리에서 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주연이 손을 아주 천천히 내밀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면서도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리고 아주 작은 용기를 꺼냈다.
“잠깐만 손… 잡아줄래?”
주혁은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의미의 놀라움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너무나 따뜻해서 그는 숨을 빠르게 들이켰다.
주연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없었지만, 그 짧은 손 맞잡음으로
서로 마음의 70% 정도는 이미 전달된 듯한 느낌이었다.
둘은 잠시 손을 잡은 채 서 있었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보지 않는 조용한 계단에서
그 순간은 오래, 천천히 흘렀다.
학교 정문을 나서면 따뜻한 오후 햇살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마을 도서관이 있는 쪽으로 가면 거리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고, 반대로 집 쪽으로 가면 노란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오늘은 이상하게 모든 풍경이 조금 더 부드럽게 보여졌다.
둘은 손을 잡은 채 걸어가다가, 학교 밖으로 나오자 주연이 살짝 당황한 듯 손을 놓았다.
“…여기선 조금…”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주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하지만 놓인 손은 서로의 체온을 기억한 듯,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기 위해 괜히 하늘을 보거나 길바닥을 보며 걸음을 이어갔다.
그 자체로도 오히려 더 귀엽고, 더 달달했다.
잠시 걸음을 옮기다가, 주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괜찮겠어?”
“뭐가?”
“현준이. 오늘 일 이후로 가만히 안 있을 수도 있잖아…”
말하는 목소리에는 불안이 실려 있었다.
주연이 괜히 주혁의 손을 바라보다, 바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주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랑 있는 게 더 좋아.”
그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를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주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너 진짜… 너무 착하다.”
“…착한 건가?”
주혁은 쑥스럽게 고개를 긁었다.
“응.”
주연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거… 되게 좋아.”
순간 둘 사이에 또다시 말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번엔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집중된 감정이 조용히 흐르는 느낌이었다.
가로등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멀리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평범한 오후 속에서 둘만의 조용한 공기가 만들어졌다.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은 공원 근처에 도착했다.
그곳엔 벤치 하나가 있고, 나무가 그늘을 길게 드리우며 딱 앉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잠깐 앉을래?”
주연이 물었다.
“응.”
둘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주연은 천천히, 정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 사실…
네가 보건실에서 내 손 잡아준 거,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주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가 그 순간을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응.”
주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이… 따뜻했어.”
그 말에 주혁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 반응을 보고 미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손등을 그의 손등에 살짝 스쳤다.
“또… 잡아줄래?”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주혁은 천천히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번엔 이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손을 놓지 않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 두 사람의 마음은 아주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 둘은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고, 고백한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향해 깊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주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그 말은 바람보다 조용했지만,
주혁의 세상을 완전히 흔들어버릴 만큼 강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 교실 안은 조용했지만 묘하게 팽팽한 공기가 감돌았다. 주연은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쳐두었지만 페이지 위의 글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자리에서 가방을 정리하던 주혁이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괜찮아?”
주연은 작은 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떨리는 손끝은 감출 수 없었다.
“괜찮은데… 그냥 조금 무서워. 괜히 또 뒤에서 뭐 할까 봐.”
주혁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따뜻한 온기가 주연의 어깨를 천천히 풀어주었다. 주변에 친구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 누구도 둘의 모습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이미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에게 어떤 마음인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함께 견디고 있는지.
그 순간 복도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학생부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시선은 교실 한가운데를 향했다.
“김현준, 잠깐 나와볼래? 다시 확인해야 할 게 있다.”
교실 안이 작은 충격파처럼 흔들렸다. 현준은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 평소의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가득했다. 그는 학생부 선생님을 따라 나가면서도 뒤를 한 번 돌아봤다. 그 시선은 주연을 향했지만, 주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교실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누군가 낮게 말했다.
“또 뭐 들킨 거 아냐?”
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주연의 손을 조금 더 잡아주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작게 반짝이는 믿음도 있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손을 잡고 앉아 있었다.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은 하나둘 집으로 향했고, 교실에는 서늘한 바람만이 남았다. 주연은 갑자기 생각난 듯 가방을 메고 말했다.
“걷고 싶어. 같이 갈래?”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학교 뒤편 작은 운동장을 지나 뒷골목 쪽으로 향했다. 햇빛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었고, 바람 속에 섞인 늦가을 냄새가 조용히 스며들었다.
조용한 길을 걷던 중 주연이 문득 멈추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하게… 무서웠던 일들이, 네 옆에 있으면 덜 무서워.”
주혁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네가 있으면 뭔가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동안 말을 아껴왔지만, 이제는 숨길 수 없는 진심이었다. 주연도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렸다. 붉은 노을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혹시…”
주연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네 마음은, 그… 뭐냐면…”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구보다 솔직해 보였다. 주혁은 그 말을 끝까지 하지 않도록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응. 너 좋아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주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고, 손끝에서 열이 번졌다.
“나도… 너 좋아해.”
바람이 스치며 그들의 고백을 사이에 두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조용히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조용하고 따뜻한 시간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음 날부터 김진의 기묘한 시선과 속삭임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김진은 복도에서 주연을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어깨를 치거나, 지나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나가네. 누가 보면 진짜 착한 줄 알겠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그 뒤에서 피식거리며 따라왔다. 주연은 모른 척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김진은 주연의 SNS를 뒤져 예전 사진을 저장하고, 익명 계정으로 이상한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연기 잘한다.’
‘뭐가 억울해?’
‘너도 잘난 척 하더니 결국 별거 없네.’
그런 댓글을 발견한 날, 주연은 충격으로 손이 떨릴 정도였다. 주혁에게 말할까 고민했지만 괜히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날 밤, 주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표정이 계속 신경 쓰여.’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주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졌다. 결국 그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SNS의 상황, 복도에서의 작은 괴롭힘, 친구들 사이에서 퍼지는 이상한 소문까지.
메시지를 읽은 주혁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단했다.
“미안. 이런 일이 생기는 거… 내가 알아채야 했는데. 내일 같이 가자. 절대 혼자 감당하지 마.”
그 말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보호의 선언처럼 들렸다.
다음 날 아침. 주연은 교문 앞에서 주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멀리서 달려오는 주혁을 보자 어제의 불안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둘이 나란히 교실로 향하는 모습에 몇몇 학생들이 속삭였지만, 그것들조차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김진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가볍게 머리를 넘기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봐라니까? 완전 붙어 다니네.”
김진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주연 자리 옆에 다가와 교묘하게 은근한 말투를 뱉었다.
“관심받는 건 좋은데, 너무 티내면 애들 싫어할 수도 있어. 그런 건 알아서 조심해야지?”
주혁은 그때 마침 주연에게 사물함에서 빌려준 필통을 가져다주려다 그 장면을 목격했다.
“지금 무슨 말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진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피식 웃었다.
“오해는 하지 마.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걱정은 괜찮아요. 그런데 말투는 좀 바뀌어야 할 것 같네요.”
김진은 잠시 굳어졌다가, 아무 말 없이 교실 뒤로 걸어나갔다.
주연은 그 상황을 지켜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날 수업 시간, 주연은 계속 긴장했지만 주혁은 곁에 앉아 조용히 종이쪽지를 건넸다.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 있어.’
그 한 문장이 주연의 마음 깊은 곳을 따뜻하게 채웠다.
며칠 후,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학생부에서 추가로 조사를 진행하면서 김진의 SNS 계정 기록이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김진은 처음엔 억울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내가 그런 거 왜 해요! 다 장난이었고, 애들끼리 그런 거 흔하잖아요!”
하지만 학생부 선생님은 단호했다.
“익명이면 괜찮다는 법은 없어. 그런 글로 누군가가 상처받았다면 그건 분명한 문제야.”
김진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았다. 오히려 진실이 드러날수록 친구들은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날 방과 후, 김진은 주연을 복도 끝에서 불러세웠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평소처럼 당당한 표정도 없었다.
“나…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어.”
주연은 당황했다.
김진은 손을 꽉 움켜쥐며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 질투한 거 인정해. 현준이 너 좋아한다는 소문 들었을 때… 그냥 너무 싫었어. 근데… 그런 걸로 이런 일까지…”
주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최소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도… 더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응. 안 그럴게.”
둘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묘하게 후련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끝난 줄 알았던 현준에게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조사를 받던 현준은 점점 불안해져 있었다. 친구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선생님도 지속적인 관찰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운동장에서 혼자 공을 벽에 던지고 있었다. 주혁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다가 멈춰섰다.
현준은 주혁을 보자마자 공을 놓고 말했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데?”
주혁은 눈을 찔끔 찌푸렸다.
“내가 뭘 했다고 그래.”
현준은 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무것도 안 해도… 다 너 때문이야. 주연이도, 애들도… 다 너만 믿고 너만 따라.”
주혁은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건 내가 바란 것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화낼 일도 아니야. 너도—”
“시끄러워!”
현준은 갑자기 주혁에게 달려들었다.
맞잡힌 손목이 거칠게 흔들렸고, 주혁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바닥에 손을 짚으며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주혁을 보고, 현준은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듯 멍해졌다. 그 순간 학생부 선생님이 운동장 쪽을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다가왔다.
“현준아, 지금 뭐 하는 거냐?”
현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모든 건 끝나가고 있었다.
현준은 결국 자숙 처분을 받고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의 표정에서 화는 사라졌지만 깊은 후회가 남아 있었다.
며칠 후, 그는 조심스레 주혁에게 다가왔다.
“할 말 있어.”
주혁은 잠시 고민했지만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나란히 학교 뒤 작은 정자에 앉았다.
현준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어. 너한테도, 주연이한테도.”
주혁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솔직히 너 이해 못했던 건 아냐. 근데… 이런 방식으로 하면 결국 혼자만 힘들어져.”
현준은 작게 웃었다.
“맞아. 나도 이제 알겠어.”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주연이… 잘 부탁한다.”
그 말에는 질투도, 분노도 없었다. 다만 어릴 적 친구에게 보내는 듯한 진심 어린 인정만 있었다.
조용한 봄바람이 불던 어느 오후, 둘은 다시 교문을 함께 나섰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며 모든 문제가 정리되고, 학생들 사이의 분위기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주연은 주혁의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요즘은… 많이 편해졌어.”
“다행이다.”
주혁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줬다.
“너무 행복한 것 같아. 네가 옆에 있다는 게.”
주연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래. 네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어.”
봄 햇살이 두 사람 위로 따뜻하게 떨어졌다.
주연은 용기를 내어 주혁의 손을 잡았다.
주혁도 같은 힘으로 감싸며 말했다.
“앞으로도… 놓지 말자. 우리.”
그 말은 약속처럼, 선언처럼 두 사람 사이에 남았다.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함께 걸어갔다.
두 사람의 첫사랑은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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